현장지원사업 기증식을 마치고 나서..

우여곡절 끝에 현장지원사업을 기증식까지 모두 내 손으로 무사히 끝마치게 되었다. 현장지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중간에 생각지도 못한 많은 난관들이 있었고, 그럴 때 마다 차오르는 짜증, 현장지원사업 실패에 대한 두려움,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나의 단원 생활에 화가 나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2015년 8월이었다. 나의 첫 현장지원사업 심의회에서 탈락되었고, 기관 동료들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했던 현장지원사업이었고, 동료들이 정말 열심히 준비해 준 덕분에 분명히 현장지원사업 심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의회 결과는 탈락이었고, 내 동료들에게 현장지원사업 심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하기가 너무 힘들고 두려웠다. 파라과이에서 2년동안 지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내 생각에는 이 부분이 단원 생활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2015년 7월 16일에 열린 첫 현장지원사업 심의회 열심히 준비했지만 통과되지 못하였다.>

파라과이에서 2년동안 살면서 현지인들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지역주민들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고, 홈스테이를 한다면 현지가족들과 관계가 형성되고, 기관에 파견되면 당연히 기관동료들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것뿐만 아니라 현지에 살면서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인연을 만들어가며, 새로운 인간관계가 많이 형성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관계라는 것은 굉장히 상대적인 것이라서, 친한 관계일 수록 상대방에게 대한 신뢰, 믿음, 애정, 관심 등이 높아지는 동시에 실망, 미움, 증오, 좌절 등과 같은 부정적인 부분도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크다.

<현지 홈스테이 가족들과 단란한 식사 시간 중..>

따라서 현장지원사업 심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동료들에게 알리면 그 뒤에 다가올 실망, 좌절 등이 너무 두려웠다. 나에 대한 실망, 코이카에 대한 실망, 대한민국에 대한 실망, ‘앞으로 내가 기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든지, ‘앞으로 기관과 협조가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등과 같은 좌절감이 들었다. 파라과이 생활을 딱 절반을 잘 지내왔는데, 앞으로 남은 1년이 걱정이 되었고, 잘 할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는 현장지원사업 심의회 결과를 숨길 수 없어서 기관동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동료들과의 모임에서 현장지원사업 심의회 탈락 소식을 전하기 직전..>

‘모두들 저를 믿고, 열심히 준비했고, 잘 따라와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현장지원사업 심의회는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 손을 들고 기다리는 순간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그리고 일어서서 동료들을 모두 바라볼 때, 동료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얼마나 떨리던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했던 첫 마디가 ‘미안합니다.’였다. 동료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무슨 일이냐고 나에게 물었고, 나는 ‘나를 정말 많이 도와줬는데 현장지원사업 심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동료들이 모두 괜찮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나를 격려해주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시작하자는 말과 함께..

<2015년 10월 30일 두 번째로 도전한 현장지원사업 심의회 발표>

그렇게 되어서 다시 현장지원사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현장지원사업 준비를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굉장히 쉽고, 빠르게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무난하게 현장지원 사업계획서 검토를 통과하고, 현장지원사업 심의회를 다시 준비하게 되었다. 한번의 발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코워커 Derlis는 큰 문제없이 프로젝트 발표를 하였다. 현장지원사업 심의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 승인이 났다. 동료들과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했고, 코이카 사무소에서 현장지원사업 협정식을 맺고 나서부터 사업 진행에 매진하였다.

<2015년 11월 23일 현장지원사업이 승인이 난 후 체결한 현장지원사업 협정식>

파라과이에 오기 전, 코이카 국내교육을 앞두고,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통장에 있는 돈으로 지내며, 백수로 생활하고 있을 때 코이카, 파라과이, 개도국 등에 대해서 많이 검색을 해봤었다. 여러 홈페이지, 블로그, 까페에서 한결같이 써놓은 글들이 현지인들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이었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고,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고,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 생겨도 본인과 상관이 없으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일 처리를 한다는 등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일어나면 안될 일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이런 일들이 생기더라도 결국에는 참고 적응해야 하거나 적응할 수 밖에 없다고 나와 있었다.

 

솔직히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현지에 파견되고 나서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걱정이 되기보다 오히려 기대가 되었었다. 은연 중에 ‘나는 저렇게 고생하지 않는 파라과이 생활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현지인들과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 해외봉사에 관한 여러 책을 읽기도 했었고, 국내교육 때는 국내교육원에 있는 도서실에서 단원들이 쓴 책들을 주로 읽었다. 선임단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선임단원들 만큼 코이카 단원 활동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은 다 똑같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언어에 대한 센스가 굉장히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입력이 있으면 결과가 출력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공식에 따라 계산을 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배웠는데 항상 바닥권을 맴돌았고, 중학교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영어는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국내교육때도 스페인어 시험을 칠 때 꼴찌는 항상 나의 자리였다. 이런 사람이 말도 통하지 않는 파라과이에 왔을 때, 정말 힘들었었다.

<국내교육 중 스페인어 시험 볼 때..>

파라과이 현지인이든 나든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한국에서 온 특별한 봉사단원이라는 생각을 버렸다. 내가 말이 통하지 않아서 힘들듯이, 파라과이 현지인들도 나와 의사소통이 굉장히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개떡같이 스페인어로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는 현지인들이 너무 고마웠다. 나도 항상 파라과이 사람들을 존중하고,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처음 파라과이에 도착했을 때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보고, 감정을 느끼는데 집중하였다.

 

약 두 달간의 현지적응훈련을 마치고 정식으로 기관에 파견되었을 때, 아직도 그 당황스러운 순간을 잊지 못했다. OJT 기간때도 코워커 얼굴을 보지도 못했고, 현지적응훈련을 마치고 정식 수료식 때도 코워커가 나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코워커가 누군지도 모른 상태로 기관에 출근했고, 동료들을 만날 때 마다 했던 나의 말은 ‘Usted es Co-Worker?’였다. ‘당신은 코워커입니까?’라고 동료에게 질문을 하면 인정사정 없는 스페인어 또는 과라니어로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었다. 그렇게 현지 기관에 정식 파견된 첫 날부터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약 두 달 가까운 시간을 코워커 찾는데 시간을 보냈고, 나의 첫 인사는 항상 ‘Usted es Co-Worker?’였다.

<2014년 9월 17일에 열린 정식단원 수료식에 나를 데리러 온 동료.. 코워커가 아니었다.>

이렇게 두 달간의 현지적응훈련을 마치고, 자의든 타의든 또 다시 두 달간의 기관적응훈련을 가지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나에게 다가오는 동료는 거의 없었고, 나는 기관 안에 있는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듣고, 책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기관 출근하기 전 ‘오늘 하루는 어떻게 시간을 때워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노래 들으며 책 읽는 것도 한계가 있어, 혼자 기관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이 덕분에 기관 상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기관의 문제점에 대해서 빨리 파악하게 되었고,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할 수 있었고,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게 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Coronel Oviedo를 돌아다니다 찾아간 어느 한 고등학교의 실습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대학교인데 이런 실습실 하나 없었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

 

기관의 현재 상태, 문제점, 해결책을 찾았으니 이것을 해결할 일이 내 임무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를 도와줄 동료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임 단원들이 쓴 책, 블로그, 홈페이지에서는 항상 코워커 또는 기관장이 함께 일을 했는데, 이 때 나에게 기관장은 파라과이 국립대학교 총장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고, 코워커는 본 적도 없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먼저 코이카 현지 사무소에 연락을 해서 코워커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 순간까지도 본인이 코워커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아무튼 코워커가 정해지고, 코워커가 뭔지 모르는 이 동료에게 ‘코워커란 어떠어떠한 거야.’라고 내가 설명해주었다. 나도 얼마나 답답하고 급했으면 코워커가 어떤 존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는데 내가 알려주고 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코워커가 정해졌다고 해서, 내가 당장 동료들을 이끌고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동료들 사이에서 나이가 어린 편에 속하고, 심지어 국립대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직원은 해외에서 유학을 하다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를 보고 ‘우리학교에 동양인 학생이 다니고 있었던가?’ 또는 ‘왜 동양인이 우리학교에 있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아직 기관 동료들에게는 이방인이었고,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기관에서 진행하는 행사 및 파티 자리에서..>

나는 이들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나는 나를 이들이 함께하고 싶은 사람으로 바꿔야겠다 생각했다. 이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놀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이들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했다. 기관에서 인정을 받고 동료들과 같은 공간에서 즐겁게 지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를 단순히 동양인으로 생각했던 동료들은 진정한 동료로써 인정을 해주었고, 수업 진행을 하다가 잘 안되는 부분은 나에게 질문하는 학생, 동료들이 늘어갔고, 기관에서 중요한 일이 있거나, 기관의 중요한 일을 정해야 하는 자리에는 나를 항상 불러서 참석시켰다.

 

드디어 이들과 터울없이 지내게 되었다고 판단이 들었을 때, 그동안 기관에 대해서 조사했던 것을 이야기하고,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였고,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 나갈 것인지 동료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가장 시급한 것은 기관의 커리큘럼 개선이었다. 실습실이 없어서 이론과 실습 수업이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수학시간에도 이론과 실습시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마이크로프로세서 같은 실습을 해야 하는 수업도 이론과 실습시간으로 나뉘어져 수업하고 있었다. 이런 체계적이지 못하고 비효율적인 커리큘럼을 이수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을 정리를 하고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실습실이 꼭 필요하지 않겠냐고 동료들에게 설명하였을 때, 정말 의기투합을 해서 ‘다 같이 해보자.’라는 분위기가 되었고, 이렇게 현장지원사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때 준비한 현장지원사업은 사업심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료들과 더욱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다른 단원들도 기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냈지만, 나는 이들과 특별한 관계였다.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내가 꼭 필요한 것이지만 분명히 이들에게는 무리한 요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동료들은 그것을 수용하려고 노력을 하였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되기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라고 나에게 꼭 설명을 해주었다. 또한 남들이 다 불평을 하는 것 중에 하나인 현지인들이 약속시간을 어기는 일은 나와 동료들 사이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몇 시에 있다고 정해놓으면 꼭 제 시간에 그 일을 하였다.

 

두 번째로 현장지원사업을 도전을 때, 심의회까지 모두 통과가 되었다. 현장지원사업 승인이 떨어지고, 한국에서 드디어 현장지원사업 물품이 출발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현장지원사업 물품들은 파라과이에 도착하지 않았다. 임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현장지원사업 물품들은 언제 도착할지 몰랐다. 코이카 규정상 단원의 활동 임기 연장은 임기 종료 2달 전에 마무리를 해야하는 것을 알고, 5월 중순에 임기 연장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5월 26일경 현장지원사업 물품들이 현지 기관에 도착하였다.

<2016년 5월 25일에 도착한 현장지원사업 컨테이너.. 임기종료가 7월 22일인데..>

이 시기가 가장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임기 연장을 신청해 놨지만,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다. 고민을 거듭하고 거듭한 끝에 결국 임기 연장 신청을 취소하였다. 나의 임기는 7월 22일까지인데, 기증식은 7월 19일에 하기로 하였다. 약 한달 반이라는 시간 안에 현장지원사업을 모두 마무리해야 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동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었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의 동료들은 7월 19일 기증식까지 모두 문제없이 끝낼 수 있다고 나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였다. 무슨 일이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하였다. 임기 연장 서류에 내가 서명만 하면 천천히 여유롭게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의 이야기를 듣고 도와주는 동료들을 믿고 부족한 시간일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해서 현장지원사업을 하였다.

 

8시에 기관에 출근하여, 저녁 8시 또는 9시에 퇴근하고, 집에서 새벽 2시 또는 3시까지 현장지원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매주 금요일마다 그 주에 진행했던 것들, 다음 주에 진행할 것들을 문서로 정리하여 사무소에 보고를 하였다. 나와 코워커는 항상 업무를 공유하였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기관 동료 모두에게 이번 주에 진행한 것들과 다음 주에 진행할 것들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매주 무엇인가 진행되는 것을 모두 확인을 할 수 있었고, 그 변화로 내가 속한 지역과 기관의 염원인 실습실이 서서히 완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약 6주간의 현장지원사업을 진행한 그 결과 6주간의 변화들이 모여서 마침내 총 10대의 최신 컴퓨터와 최신 실습장비들로 이루어진 실습실을 완성할 수 있었다. 더불어 3권의 매뉴얼 및 프로그래밍 기본 교재와 1권의 번역 매뉴얼까지 하여 총 4 종류의 책을 완성하게 되었고, 기본 교재가 없었던 학생들에게 드디어 기본 프로그래밍 교재가 주어지게 되었다.

 

현장지원사업을 준비하면서 또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바로 기증식 준비다. 기증식 때 증정할 감사패와 실습실 현판을 제작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기증식을 동료들이랑 준비를 하며, 현장지원사업 기증식이 어떠한 것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가장 최근에 했던 90기 단원이 기증식 프로그램 순서를 동료들에게 알려주었고, 각 프로그램 순서 마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이해를 하겠다는 동료들은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나는 실습실이나 잘 마무리하는데 집중하라고 하였다.

<2016년 7월 18일.. 현장지원사업 기증식 하루 전날.. 기증식 행사장을 만드는 모습..>

동료들의 헌신과 노력덕분에 코이카 파라과이 현지 사무소와 약속한대로 7월 19일에 기증식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정말 나는 실습실 준비 마무리 때문에 기증식은 동료들에게 모두 맡겨놓고 신경도 쓰지 못했는데, 내 예상을 넘어 너무 많은 것들을 준비를 해주었다. 분명 기증식 준비하는데 들어간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기증식 참석을 위해 코이카 파라과이 현지 사무소 소장님과 코디네이터님, 인턴님, 그리고 동료 코이카 단원분들께서 새벽 일찍 출발하여 제 시간에 맞춰서 도착해 주신 덕분에 기증식은 계획대로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할 수 있었다.

<2016년 7월 19일 현장지원사업 기증식에서 감사패 전달식>

이윽고 기증식이 모두 끝나고, 동료들은 모두 나에게 기증식이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정말 너무 많이 준비를 해줘서 많이 놀랬다고 하였다. 동료들은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이렇게 해주는게 전부라며 아쉬워했다. 이들은 이미 내가 코이카 단원 임기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어질 날이 언제인지 모두 알고 있었으며, 그 날이 다가온다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파라과이에서 살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자신의 친척 중에 나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가 있다고 소개시켜 준다고 그러기도 하고, 비록 농담이지만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많이 비췄었다. 이런 표현을 나에게 해줄 때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현장지원사업을 마무리하고, 2년간의 파라과이 생활을 앞둔 지금에서 2년 전의 나를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때의 나는 이들을 변화시켜서 무엇이든지 발전을 시켜보겠다는 생각은 굉장히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누구이길래 이 사람들을 바꿀 생각을 했을까? 2년간 남들보다 더 멋진 활동을 하고 싶어서 저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들을 위해 활동을 해야 할 내가 이들 위에 있을 생각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해보면 참 아쉬운 것이 많은 2년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도 아순시온으로 가는 길에 버스를 타고 많은 생각이 든다. 더 잘 할 수 있었고, 분명 더 많은 것들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순간 최선을 다 했지만, 지나고 나서 지금에서야 ‘정말 최선을 다 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게 너무 이상했다. 분명히 난 최선을 다 했는데 왜 아쉬움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시간이 흘러도 이 아쉬움으로 파라과이에서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을 잊지 말라는 것이겠지..

<2016년 7월 19일 현장지원사업 기증식 종료 후 기념촬영>

 

2 Replies to “현장지원사업 기증식을 마치고 나서..”

  1. 모든 선한 행위는 자선 단체입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부자가이 세상에서 그의 동료들에게하는 선입니다. 축복을받는 것이 좋습니다. 축복이되는 것이 낫습니다. 고맙습니다 ~ 유리

  2. 오,, 처음에 정말 황당하고 막막했겠네요,, 선생님이 얼마나 노력하셨을지 눈물겹네요
    니카라과 공항에서 뵀었는데 대단한 분이셨네요 ^^ 현장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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